[상근수첩] 뉴페 시도의 민달팽이

2019-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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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급여받는 일을 처음 시작해서 학자금 대출을 갚고 스스로 벌어 먹고 산지 10년이 되었다. 88만원을 받으며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나와 잘 맞는 일터를 만나 열정과 희열을 느끼며 일하던 매일이 있었다. 권태와 매너리즘에 몸부림치던 때도 있었고 쫄보가 되어 자책과 배움을 오가던 시절도 있었다. 지역을 이주하고 새로운 시도로 가슴 벅차 달려가던 때도 있었고 번아웃으로 밑바닦에 찌꺼기만 남아있던 시간도 길었다. 앞이 보이지 않고 밑도 위도 없는 깜깜한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 더듬거리며 앞으로 가다보니 걸음 아래 빛도 보이고 내 발도 보였다. 어느 순간에는 저 앞에 등대를 따라가면 되겠단 느낌도 들었다. 강산이 변하는 10년간 이런저런 일경험 속에 나도 조금은 변했다. 새로운 시작 앞에서 어떤 조직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많이 고민했고 숙고 끝에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이하 ‘민달팽이’)를 선택했다.


* 예비입주자에게 LH제기동 달팽이집을 보여주러 갔다가 옥상에서 일몰을 보았다. 괜히 가슴이 벅찼다. (난 원래 일몰을 좋아한다)


# 민달팽이집에 삽니다

3년째 거실을 공유하는 집에서 입주조합원으로 살고 있다. 돌아보면 타인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시간이었다. 함께 살아가는 감각이 요구되는 공간이다보니 피로감이 높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자치라는 이름으로 커뮤니티가 유지되고 촉진될 수 있는 계기와 대화들을 함께 잘 만들어온 것 같다. 개인이 존중되고 좋은 함께가 가능한 느슨한 공동체가 무엇인지, 생생하고 사소한 일상의 현장은 우리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고 때론 피하고 때론 직면하며 자주 토론했다. 집에 대한 이야기는 늘 답이 없고 그럼에도 매번 지겹지 않는 주제였다. 조합원으로써의 정체성이 높아지는 계기도 있었는데 2017년 사무국의 조직문화 이슈를 바라보며 함께 사는 이들과 새벽까지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많이 고민했다. 반성도 하고 비판도 하며 성찰하는 시간은 조합원으로써 주인의식을 갖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 민달팽이에서 일하게 된 이유

서로가 서로에게 성장의 동료였고 함께 살아가는 훈련을 통해 커뮤니티 근육이 생기면서 이와 관련된 일을 해보고 싶었다. 외면했던 시기도 있지만 공동체는 나의 오랜 지향이었다. 주거공동체를 수년간 경험하며 느낀건 주거를 기반으로 상호 접촉의 시간이 확보되는 조건은 강제적이지만 공동체가 형성되기 좋은 환경이라는 점이다. 거기에 큰 매력을 느꼈다. 공동 주거를 기반으로 커뮤니티를 지원하고 관찰하고 해석해보고 싶었다. 해보고 싶은 게 있다는게 얼마나 반짝이는 일렁임인지 침잠하던 시기에 있던 나는 오랜만에 기뻤다. 조직문화 이슈 이후 평등하고 소통이 활발한 조직을 만들기 위한 사무국의 노력이 지속되는 모습 역시 같이 일해도 되겠다는 신뢰를 주었다. 

*1박 2일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 이사회. 밤 12시까지 이어진 대화는 이사회의 역할과 민쿱이 지향해야할 가치를 중심에 두고 열띠게 토론하는 시간이었다. 유익하고 즐거웠다. 이런 토론이라면 잠도 아깝지 않아.


# 낯섬과 설렘

밀도 높은 사무실에서 나와 화장실 문을 열면, 확 다른 온도와 공기가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기분을 들게한다. 모두가 분주한 상황 속에서 혼자 누리는 시간이 확보되고 이를 음미하는 여유가 꽤 행복하다. 아마 매일 출근하게 되면 그저 화장실로 전락할 이 곳이 몇 번 출근하지 않은 이에게는 낯선 감상을 주는 것이다. 시설은 그닥 좋지 않지만 입구에 들어가면 향기가 나고 변기에 앉으면 따스함이 느껴진다. (특히 엉덩이에 느껴지는 온도는 꽤 감동적이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노란 은행나무잎이 계절을 느끼게 한다. 비데도 설치되어 있고 순간온수기가 있어서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지만 불편함 없이 사용하도록 설비가 되어있다. 이 이야기를 꽤 길게 하는건 내가 화장실을 좋아하는 변태라서가 아니라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다. 처음의 낯섬과 설레임은 작은 것도 오래 살펴보고 관찰하는 시선을 갖게하는데 금방 사라질 신기루라 글로라도 붙잡고 싶은 것이다. 


# 매주 목요일 점심

매주 목요일 점심은 민달팽이유니온과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이 함께 점심을 먹으며 조직문화를 이야기를 하는 날이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궁금했는데 한주간 일과 관련해서 각자의 고민을 나누는 공식적인 자리였다. 몰려오는 일을 쳐내며 개인의 마음과 생각을 나눌 여유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가는데 의도적으로 틈을 내어 서로를 보는 시간이라고 여겨졌다. 내가 참여했던 날은 각자의 5년 후, 10년 후를 이야기하며 미래를 나눴는데 구성원들이 개인의 삶에서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지 짐작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지금은 같은 사무실에서 공기를 나눠 마시는 사이지만 언제 또 다른 길로 갈라지고 다시 만날지 모르는 일이구나, 먼 미래에 만나 지금을 추억할꺼라 생각하니 옆에 앉은 동료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으로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 감동란처럼 감동적인 온도의 변좌에서 보이는 창문 밖 은행나무. 절정이다.

 

# 균열과 확장

주거도시정책포럼의 2019년 마지막 모임 겸 송년회에 참석했다. 50대 이상의 변호사와 박사님들 안에서 민달팽이 유니온과 주택협동조합의 젊은 존재들이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1시간동안 LH 변창흠 사장님의 강의를 듣고 1시간동안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서로 다른 위치와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생각을 부딪히고 수용하는 과정이 정중한 전투같았다. 나와 다른 세대와의 결합은 좋지 않은 경험이 많은터라 의도적으로 피해왔던 부분이 있는데 이곳의 신구 결합은 서로의 존재를 감사하고 존중하고 응원하는 모습들이 감동적이었다. 못 알아먹는 주택정책도 많았고 무엇이 더 좋은 것일까 고민되는 지점들에서 배움도 일어나고 배움의 동기도 함께 일어났다. 송년회 겸 술자리는 어색했지만 지식과 실력이 높은 분들과 동석해서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 속의 나는 이질적이고 신기했다. 일을 통해 만나는 새로운 우주가 주는 낯섬과 감동이 꽤 찌릿해서 기존의 편견과 경험에 균열이 가는 느낌이 좋았다. 청년주거라는 의제가 좁고 고정된 관점을 가졌을거라는 편견들이 있다. 하지만 청년이라는 세대를 통해 우리 사회의 약한 부분들을 드러내고 이것이 한 세대의 문제일 수 없다는 문제인식을 나누고 함께 해결하자고 말하는 곳이 민달팽이라고 생각한다. 주거도시정책포럼에 오신 분들은 민달팽이를 주거문제를 함께 해결할 동료이자 미래라고 인식하는 듯 했다. 내가 알았던 민달팽이보다 더 넓은 민달팽이를 경험할 수 있어 좋았다. 나의 세상을 열어주는 관점과 경험을 민달팽이에서 더 많이 할 수 있으면 좋겠다. 


# 이제 시작

민달팽이에 오기 전에는 입주조합원으로써 같이 사는 식구들과 이런저런 불평과 개선안들을 나누었지만 이제 그 해결의 몫은 고스란히 나에게 있다. 내뱉는 말에 책임감이 더 느껴지기도 하고 주체적으로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시원하기도 하다. 출근해서 만난 사무국은 자율적이고 활력있고 일처리도 기민하다. 놓치지 않고 점검하는 책임감 높은 사무국장이 있고 대외활동에 탁월한 이사장이 있다. 농담도 일도 센스 넘치는 동료와 모든 집의 입주 과정을 책임져온 꼼꼼한 동료가 있어 든든하다. 애정 높은 조합원의 입장에서 사무국의 빈 틈을 내가 메우겠다는 호기로움이 민망하게도 사무국은 아주 잘 운영되고 있었다. 기대와 예상대로 일상적인 업무를 배우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해나가면 될 것 같다는 확인을 하며 맘이 편해졌다. 잘. 온. 것. 같. 다.  

* * 예비입주자교육에 아이디어를 냈다. 6by6 라는 툴을 통해 테이블별로 질문을 나누자고. 이전에 했던 활동에서 좋았던 질문을 참조해 집과 공동체에 관련한 질문들을 만들었다.  동료들과 질문을 만드는 과정도 재미있었고 현장에서 참여자들이 만드는 대화의 경험도 즐거웠다. 부직포에 질문지를 붙여 구성에 따라 재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정헌의 센스에 감사! :-D